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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스런 시선/Movie

[김PD의 영화보기] 눈먼자들의 도시 : 하얗게 흘러내린 망막에 현재를 투영하다

081123 /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 센트럴시티 시너스 / 18:35~20:40 / 지은 /



#1. 예상치 못하게 찔리다
'28일'같은 공포영화인 줄만 알았다.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지.
영화를 보면서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폐부 깊숙이 뭔가 날카로운 것이 파고들어 숨쉬기 쉽지 않은 그런 느낌.

몇번이고 영화를 보면서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으나 그 답답함은 영화가 끝나기 10분전까지 사그라들지 않는다.
내게 무슨 폐소공포증이라도 있는걸까 아니면 그냥 영화에 너무 많이 이입한걸까.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를 보면서 내내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쳐댔던 내가 이 영화에 대해 다시 리뷰를 쓴다는 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공포감을 온전히 되살려야하는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머리 속에 맴도는 말들을 토해내지 않으면,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뒤섞인 생각의 파편들이 뇌리에 깊이 박혀 응어리질 수도 있겠다싶다.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


#2. 익숙한 갑갑함 혹은 낯선 기시감

1) Irreversible(돌이킬 수 없는) : 움직일 수 없는 가학성의 유사성

- '모니카 벨루치'가 출연한 이 영화는 시간을 역순으로 되돌리며 진행되는 '메멘토'와 유사한 형식의 영화로, 감독 '가스파 노에'의 가학적 성향이 물씬 풍겨나는 영화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된 일그러진 한 남자의 숨가쁜 애원으로 시작하는 '돌이킬 수 없는'은 너무도 완벽한 한 여성이 폭력과 가학적 강간을 당하는 과정을 그녀의 눈높이에서 고스란히 보여준다.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묵직한 핸드핼드는 폭행당하는 여성의 시선을 묵과하는 지긋지긋한 세상과 주변의 무기력함을 조롱하듯 관찰한 뒤, 그녀의 행복했던 일상으로 카메라를 움직인다.
'행복한 여성의 불행한 미래'를 보는 것보다 '불행한 현재를 가진 여성의 행복했던 과거'를 보는 편이 훨씬 더 괴롭고 불편하다. '행복한 여성의 불행한 미래'는 움직여질 여지가 있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불한한 여성의 행복했던 과거'는 이미 벌어진 그녀의 지울 수 없는 상채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연출은 영화 속 주인공이 받았던 가학성을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보는 이에게 어떤 감정이 숨쉴 수 있는 여지도 주지 않는 완벽한 가학성으로 인해 숨은 헐떡거리고 영화의 잔상에서 벗어나는 데 며칠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영화 속 가학성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이입시킨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Irreversible'이 떠올랐다. 그 저항할 수 없는 괴로움이 떠오를 수밖에...


2) Dogville(도그빌) : 세트로 만들어진 세상 VS. 설정으로 만들어진 세상 / 어쨋든 축소판 세상

-  라스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은 의도된 세트, 흰 줄로 구획을 나눠 이쪽과 저쪽을 가리는 편가르기, 개코딱지만한 공간을 나누고서는 그것이 자기의 것이라 기득권을 주장하고 어디서 배웠는지 못된 군중심리를 배워 한 사람을 몰어부치는... 만들어진 세상은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난센스로 점철된 영화이다.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하얀색으로 눈이 멀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하나의 공간으로 처박아놓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혼란을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설정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적인 세상에는 또 다른 힘의 논리가 등장하고, 이성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은 사라진다. 심지어 소유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금부치를 그러모으는 어리석은 인간의 단면이 드러나고 성상납과 살인이 자행되는 버러지만도 못한 공간.

가둬진 공간이라는 설정. 외부와의 단절을 통해 얻어진 공간은 처음엔 그들을 옭아매는 족쇄였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외부는 단절하고 터부시해야할 대상으로 변모하고, 자신들의 세상 속에 자신들이 군림할 방법을 찾는 탐욕스럽고 우매한 단면이 드러난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한 것은 내 속에 있는 나의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워서인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두렴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느쪽으로든 유쾌한 상상은 아니다.

두 영화에서처럼 여성 메시아가 등장해준다면 또 모르지만, 삶은 실재일뿐 환상이 아니다.

#3. 나에게 투영하여...
- 영화가 끝나고 아내와 몇 마디 나눴다. 지독한 불편함에 영화가 끝난 후에도 답답해하던 나와 달리, 아내는 짐짓 평안하게 해당 내용에 대한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는 달리 그녀가 영화에 몰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기가 '줄리안 무어'의 역할이었어도 자신은 줄리안 무어처럼 했을거라는 게다. 거기에, 나는 주인공 남자의사보다 더 강하게 그녀의 박애주의의 발로를 제재했을 것같다고 말했다.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인식의 차이 혹은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점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주어진 상황을 바르게 만들려하는 방법으로 내부를 변화시키는 것을 선택했고, 나는 거기에 사용할 힘을 이 어려운 상황을 타계하고 상황을 전복시킬 내용을 준비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자가 현명하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감래하는 대가는 너무 잔혹하다.
후자는 어리석다. 눈이 먼 상황에서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 수월하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괴로워지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뿐이다. 하지만 전복을 택했을 때 조금은 더 안락할 수 있다. 단, 그 역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권력이며 기득권이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고민해봐야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바는 익히 알려진대로 정부의 무능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분배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작은' 정부는 눈먼자들에게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라고 말하거나, 눈먼자들을 위해 안내 비디오를 제작하는 어리석은 존재다. 게다가 그들을 대화를 할지도 모른다. 일방향의, 유일한 대화 매개인 비상전화는 수신인이 없다. 다리가 망가질 수도 있으니 항생제를 주시오라는 요구에도 총부리를 겨누는 그들은 대화를 모르는 무능한 존재다. 결국은 그렇게 세상은 창궐한 전염병으로 아비규환에 이르러 파멸할 것이다. 물론 그럴리 없다. 영화처럼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나서 우리를 인도하거나 불이 나서 쓸모없는 것들은 다 죽거나 하겠지.
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상상과 기대만으로 현실을 살아간다는 건 때론 너무나 괴롭다.

이미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지도 모른다. 순응하며, 혜안을 갖고 내부 조율을 통해 기틀을 만들어가야할지, 조금은 강한 어조로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내놓는 적극적 지성인의 자세를 갖춰야할지... 그 누구도 태도를 분명히하라 강요하진 않지만 말이다.

#4. 영화가 끝나고 궁금한 것 몇 가지
 1) 검은 안대를 한 노인과 선글라스를 쓰고다니던 여인은 (여인이 만약 눈을 뜬다면) 이뤄졌을까.
 2) 사람들은 노인의 내레이션대로 눈을 떴을까? 기대했던 결과가 이뤄지지 않아 더 큰 혼돈속에서 사는 건 아니었을까.
 3) 줄리안 무어가 '눈이 멀지 않은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에 대한 질문은 '군대를 가지 않은 나는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에 비해 무엇을 배웠는가'라는 질문과 유사한 어리석은 질문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
 4) 영화등급위원회는 각성한걸까. 이 영화를 심의에서 누락시키지 않은 건 아직은 우리정부가 그렇게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1960년대에 비해)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아니면 그들의 영화를 읽어내는 눈이 부족해서 일까.
 5) 4)의 연장선상으로... '눈뜬자들의 도시'가 만들어지면 개봉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