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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의 기록/일상 속 옹알이

[김PD의 옹알이] 아버지와 나


내 나이 서른 둘. 며칠 후면 서른 셋.
아버지 연세 예순 둘, 며칠 후면 예순 셋.

대쪽같은 아버지. 타협도 모르고 본인이 생각한 건 굽히지 않는 아버지.
천상 경상도 사람. 딱 4~50년대 어른의 전형. 무뚝뚝하고 불같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나는 참 싫었다.

지난 12월 어느날.
10년된 장롱면허를 과감하게 꺼내들고 아버지께 운전 연수를 부탁했다.
솔직히 걱정됐다. 주변 사람들도 아버지한테 하지 말고, 형한테 하거나 친구한테 하라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수는 해야겠고, 차는 없고, 아버지 말고는 배울 사람이 없는게다.
나는 아버지가 윽박지르며 잘 못한다고 화내시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그런 마음으로 아버지가 계신 우리 집을 찾아갔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지 한달 째인 집은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어머니의 빈곳이 느껴졌다.
형과 아버지의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집안. 아버지는 12월이 되었는데도 보일러도 켜지 않으시고 계셨다.
10시 즈음 오기로 했던 아들녀석은 2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는데 별 말씀이 없으시다.
밥 먹었냐고 물어보시기에 떨려서 못먹겠다고 했다.
그러자, 쓸쓸히 라면 끓이러 가스랜지 앞으로 향하신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 나도 한 그릇 먹겠다고 하고 내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2분정도의 빠른 시간에, 별 말도 없이 아버지와 라면을 먹었다.
'나가자. '
항상 그랬던 데로 아버지는 나보다 먼저 집밖에 나가셨다.
항상 그랬던 데로 경적을 울리며 빨리 나오라고 하시겠지.
늦으면 안되기에 발걸음을 빠르게 한다.

병원에 입원해계신 엄마의 얼굴을 잠깐 보고 바로 병원을 나섰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서 빨리 가자'
짧지만, 날이 서있는 아버지의 말.
굳이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닌데,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채근하는 말투를 가지셨다. 심지어는 아픈 엄마에게도...

집근처 아무데서나 연수하면 될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굳이 남양주쪽으로 가자고 하신다.
그러면서 조용히 말씀을 꺼내신다.
'운전연수하면서 사람들 눈앞에서 하는게 젤 어렵다. 잘못하는게 보이면 창피하고, 흥미도 떨어지게 돼지.
지금 가는 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니 니가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감을 익혀봐.'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내가 뭘 싫어하고 어떤 식으로 운전연습을 해야하는지 며칠을 고민하신 듯했다.
그렇게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지나 공사하는 다리 밑에 공터로 데려가시더니 말 없이 내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창문 열고 운전해라. 아빠가 밖에서 얘기 해줄테니까. 밖에 돌로 길을 만들어놓을테니까 금밟지 말고 운전하고 몇번 니가 하고 싶은데로 해봐라.'
추운 날씨에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셨고, 이리저리 큰 돌을 주워모아 아들이 연수할 길을 만드신다.
그리고는 계속 말씀하셨다.
'아빠도 보고있지 않을테니까 니가 하고 싶은데로 해라.'
그렇게 큰 돌들을 날라 몇십분에 걸쳐 길을 만드시고는 저쪽 언덕 너머로 사라지셨다.
그렇게 한시간 남짓을 코스 주행하듯 연습했다.
엑셀레이터와 브레이크에 얹는 발조차 무서워하던 나를 아버지는 1시간 내내 묵묵히 바라보고 계셨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에 대해 쌓아놨던 내 마음의 벽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새삼 느꼈다.
이렇게 아버지는 나를 잘 알고 배려하시는데, 나는 뭘하고 있었던걸까.
결혼한 이후, 엄마의 마음은 조금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은데, 정작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한 적도 없었던 것같다.

차를 타고 도로주행을 해보자는 아버지를 따라 외딴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하고 있냐는 엄마의 물음에
'진작 할 걸 그랬어요. 아버지가 너무 잘 해주세요. 너무 편해.' 이 말만 반복하며 엄마에게 아버지 자랑을 계속했다.
이후 15km정도의 거리를 시속 4~60km로 달리며, 나의 첫 도로연수를 마쳤다.
'이렇게 한 세네번 운전하면 금방 잘할 수 있겠다. 한 시간 반정도했는데 벌써 많이 좋아졌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서 몇 년만에 칭찬이라는 걸 들었다.

성남 우리 집에 나를 데려다 주시고 가시려는 아버지를 잡아 저녁을 대접하려고 했다.
반나절을 위태위태한 차량과 찬 바람에서 기다리신 아버지께 맛있는 고기를 대접하려 했건만 아버지는 tv에서 돈까스와 청국장을 보시더니 그 두 가지 음식이 드시고 싶다고 하시는거다.
아내도 야근으로 집에 늦게 들어올거고, 마침 집에 청국장과 돈까스가 있어서 내가 밥을 차려드리기로 했다.

밥을 하다가 거실을 쳐다봤더니 아버지는 소파에 기대 코를 골고 계셨다.
안방에서 이불을 꺼내 깔고 잠깐 누우시라고 했는데도 굳이 소파에서 tv보시는 척 하시다 잠이 드신다.
그렇게 몇 분을 쳐다봤다.
마음이 아리다.
집에 엄마도 안계시니 아들과 같이 식사하고 싶으셨던 아버지 마음이 새삼 아리고, 어느덧 인구조사하게 되면 '노인'으로 분류될 아버지의 얼굴과 흰머리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돈까스에 청국장. 안어울리는 조합으로 밥상을 차리고 밥한공기 가득 채웠다.
아버지에게 좋은 음식들을 사드리진 않았지만, 내 손으로 차려드린 저녁 식탁이라 마음이 한결 좋았다.
아버지는 예의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시더니 '너무 많이 먹었다'시며 소파에 앉아 그렇게 한참을 계셨다.


엄마라는 존재는 참 특별해서 나이가 들면 그 애틋함이 커진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존재는 애틋함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 마음을 참 오랜만에 느꼈다.
강하고 단단하고 뜨거워서 범접하기 어려웠던 아버지를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애잔함을 가진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그만큼의 세월이 흘러갔음이 힘들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조금은 더 가까운 존재로 다가온 것 같아 평안하다.

젊음의 기운과 힘을 여전히 갖고 계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기백을 여전히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고, 그 속에 아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느낄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자주 못 찾아뵙는 나쁜 아들이지만 마음은 참 많이 닿아있다. 아버지에게로...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엄마 아버지 두분 모두...


* 결혼한 아들이 있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가슴 짠하긴 하지만... 읽고 싶으신 분만 읽으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