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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스런 시선/Movie

[김PD의 영화보기] 더 리더 : 날카로운 첫사랑, 한 남자의 인생에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생채기

090404 / 더 리더 : 책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 강남 CGV/ 19:00~21:13 / 지은

사실 영화 <더 리더>를 본지 벌써 2주가 다 되어가는데, 리뷰가 잘 써지지 않아서 며칠을 조바심과 함께 지냈다. 
영화 <더 리더>는 논리적으로 리뷰를 쓰기보다는 정말 보고 난 직후의 감정을 그대로 투영하는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그 감정이 사라질까봐 걱정되고 두려워서 더욱 그랬을게다. 
그런데 열흘정도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괜한 조급증이었다 싶다. 오히려 조금은 더 덤덩하지만 내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만큼 영화 <더 리더>에 대한 감정이 곰삭은 느낌이 든다.


하룻밤을 함께 한 나신의 여성에게 먹을 계란 반숙과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내놓을만큼의 배려를 가진 한 남자.
하지만, 아침을 함께 먹을 자신은 없는 남자.
15세에 경험한 날카로운 첫사랑의 기억은 한 남자의 인생을 베어내어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체기를 남긴다. 
영화 '더 리더'는 영원히 아물지 않은 첫사랑의 기억과 상처를 동시에 안고 살아가야하는 한 남자의 고난한, 정체된 성장기. 

1.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소년과 사랑을 믿지 않는 여인이 있었다
 - 사랑이라는 감정이 워낙 우스워서, 전혀 사랑이라는 감정적 케미컬이 발동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수 많은 사랑이 싹튼다. 전쟁의 난리통에서도, 음습한 뒷골목에서, 때로는 아주작은 어깨의 부딪힘만으로도... 
영화 <더 리더>에서의 사랑은 구역질나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양동이에 물을 받아 바닥을 청소하고, 비린내나는 소년의 얼굴을 씻겨준 한 나이많은 여자에게 느끼는 15세 소년의 사랑은 정말 '영화같은' 사랑의 찰라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여인과 소년은 여인의 농익은 젖가슴과 소년의 젖비린내나는 우윳결 피부의 차이만큼이나, 그 둘은 사는 방식도, 사랑에 대한 생각도 달랐다. 하지만 페로몬의 짓궂은 농간으로 인한 감정이 언제나 그러하듯, 소년과 여인의 관계에서 그런 부분은 전혀 중요치 않다.
먼저, 여인은 욕구를 채우고, 소년은 사랑을 느낀다. 목적은 다르지만 같은 방법으로 그렇게 둘은 교감한다.
서로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을 만큼 직접적이고 솔직한 육체의 끌림에 충실했던 여인과 소년은 점점 더 서로의 그늘을 보듬기 시작한다. 소년은 관계 전, 책을 읽어달라는 여인의 요청에 충실히 응한다.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그녀와의 사랑을 위한 전희이며, 무엇보다 달콤한 애무였으리라. 좁디좁은 욕조에 마주앉아 몸을 맞대고 있는 순간은 에로틱하기보다 단호하며, 자신의 가슴팍에 안겨 오열하는 여인의 흐느낌은 숭고하다.



때로는 급작스럽고 예기치못한 여인의 반응에 소년은 놀라기도 하지만, 그정도쯤은 개의치 않을만큼 소년은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거를 알 수 없는(알리고 싶어하지도 않는) 여인은 자신의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조금씩 노출하는 사실에 조심스러워진다. 함께 떠난 자전거 여행에서 소년은 더욱 깊어지는 사랑을 확인하게되면서, 사랑을 믿지 않던 여인 역시 한없이 투명한 소년의 사랑에 조금씩 자신도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가 평생을 안고 살아야할 과거와 비밀(감시관이었던 과거와 문맹에 대한 비밀은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이다)이 드러날 때마다 여인에게 소년과의 사랑은 불안하고 불편함으로 남는다. 그렇게 마지막을 정리하던 여인은 자신의 체취만은 아련하게 남긴 채 그렇게 팍팍하게 사라진다.

이제 막 사랑을 알게 된 소년은 평생 사랑을 믿지 않게 된다.





2.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대
넌 가끔 내 생각 하며 살고있니 나의 사랑
슬프지는 않니 지나버린 그 시간들이
조금만 날 이해해줘
남잔 첫사랑을 잊지 못한대
나도 잊는걸 이제 포기해 버렸어

- 이승환 '너의 기억'중에서 -

지독한 첫사랑의 열병은 사람이라면 누구가 걸리는 감기와 같다. 흔히 겪기 힘든 농익은 여인과의 날카로운 첫사랑이든, 동갑내기 코묻은 국민학교 급우와의 첫사랑이든 그 날카로움은 겪는 사람이 가장 힘든, 죽을 것같은 생채기를 남긴다. 그 생채기가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사랑에 대한 불구로 살아가든, 이를 극복하든, 개인차는 존재하겠지만, 남자들에게는 첫사랑의 상흔이라는 건 어깨에 있는 불주사같은 것이 된다. 

영화 <더 리더>의 주인공(마이클)은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도 그렇게 절름발이로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가 말없이 떠나간 여인을 탓하지 않는다. 첫사랑인 여인이 피고인으로 있는 재판정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은 흔들린다. 그 흔들리는 눈빛을 소년의 감정으로 오롯이 담아낼 수는 없었으나, 남자인 나도 첫사랑에 대한 애잔한 그의 눈빛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같다.
사랑하는 나를 버리고 떠난 그녀가 험한 꼴을 당하고 있음에 대한 감정은 안타까움과 괴로움이다. 왜 더 멋지게 살고 있지 않느냐며 탓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떠나간 그녀를 위한 마지막 나의 사랑은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묵묵한 배려뿐이다. 그렇게 그는 외로운 여인의 수감생활을 돕지만, 그녀의 인생에 개입할 생각도, 그녀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도 없다. 다만 그녀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다소 기이하고, 편집증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의 '책 읽어주는' 행위는 그렇게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남자들의 가슴 한켠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건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어느새 내 일부가 되어버린, 하지만 이미 퇴행해 쓸모없이 사라진 꼬리뼈를 어루만지는 안따까운 연민일 따름이다.